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단순히 말씀을 사랑하라는 뉘앙스나, 일을 하는 마르다의 영성이나 말씀을 묵상하는 마리아의 영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예수님의 접근과 폭넓게 사람들을 품으시고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급진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여성을 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의 놀라움은 마리아가 남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마르다가 질투하거나 일 때문에 투덜거리는 것을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집은 우리나라의 옛날과 같이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공간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만 나누어 있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도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남녀를 구분하는 집안의 경계선을 넘어선 것이고, 이 경계선을 넘어선 것은 사회적인 통념의 경계선도 넘어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거실은 남성들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여성들은 부엌이나 외부인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구역에 있었습니다. 남녀가 같이 있을 수 있던 공간은 침실이나 아이들이 보는 곳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곳은 거실입니다. 이 거실은 남성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런 공간에 여성이 그것도 바로 예수님의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다는 것이 연정이나 사랑을 느껴서 하는 행동으로도 볼 수 있지만, 사도행전 22장 3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하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 듀스 포다스> 입니다. 이 말이 “마리아가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라는 헬라어와 같은 말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곁에 앉아있다는 말은 단순히 흠모해서 예수님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트를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발치에 앉는 것은 분명 남성의 역할이었습니다. 그것도 스승 다음으로 그 역할을 할 사람으로서 자신을 볼 때만 가능합니다. 마리아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자로서 자신을 보며, 그것을 넘어 스승과 같은 위치에서 설교자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행동에 마르다는 황당할 수도 있고, 남성들에 의해서 욕을 먹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마리아를 언니로서 걱정해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리아도 일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로써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발언을 하십니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제자로서 혹은 스승의 바로 다음으로써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리를 탐하는 마리아의 마음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역할을 마리아에게 부여하여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마리아에게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실에 있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인도 제자로 받아들이시며 아끼는 수제자의 위치에 두신 것입니다.
사족: 이런 면에서 교회 안의 여성의 역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하는 사람이나 돌보는 자, 기도회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교회를 운영하는 자리에까지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로 여성이 서는 날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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